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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서학역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10/12/28 20:08:49
조 회  
1883


 

     서학 역리 (棲鶴 逆理)


  ‘한국에 있어서 사고력 교육의 전통’을 알아보려는 것이 이 문제를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나 민속 교육 그리고 불교교육이나 도교교육 등도 우리의 전통 문화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으나 필자는 유학교육을 선택하여 검토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학(儒學)교육은 지난 600여 년간 국가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개발 보급되었으며 관학(官學)이나 사학(私學)을 막론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학교육의 필독서 중에서 <논어(論語)>를 우선 탐구대상으로 삼았다. 그 첫 장의 다음 구절에서 이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필자는 이에 관해 <성숙의 불씨>라는 곳에 “철학하기와 무본(務本) (- 2009년 8월 27일자)”와 “내가 미쳤나 세상이 미쳤나 (-2009년 9월 10일자) ”를 기고한 바 있으며 이를 한국철학교육 아카데미의 공식 웹사이트 (http://www.katpis.org)에 전재하여 2010년 12월 말 현재 각기 1100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동안 직접적인 반응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 자신이 이에 몰두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방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0년 12월 20일 이를 다시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가깝게 지내던 철학계의 선배, 한전숙님이 타계하여 문상 때 서강대학교 정인재교수를 만나 타계하신분이 몰두하시던 현상학회의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 계기이다. 전철을 타고 잠시 나눈 대화이라 상세한 검토는 하지 못했으나 동양철학을 전공하신 정교수가 사계의 문외한인 필자의 위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말씀을 하였다. 

    철학한다는 것 (philosophieren)는 것은 결국 務本으로 보인다며 현상학은 아마도 그것을 직관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추구한 것으로 필자는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논어>의 윗 대목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정교수는 이 대목을 암송하며 설명했다. 本과 道가 연결되는 대목을 필자는 공감하나 그 다음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의 번역들에서 효제를 인의 본으로 풀이하는 것은 잘 못인 것 같다고 했더니 잘 본 것이라고 정교수는 고무적인 평가를 해주었다. 이에 용기를 얻어 필자는 다시 최근 번역서들을 들쳐보고 이 부분의 주석도 알아보게 되었다. 물론 주석도 모두 번역된 것이다. 필자가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단순한 번역문제나 자구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전문가도 논리적 사고력 교육을 받으면 전문가들의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문뿐 만아니라 희랍어, 라틴어, 영어, 독어, 불어 등  그 많은 언어를 모두 습득하여 논하기는 어려우므로 결국 모국어로 번역한 것을 통할 수밖에 없는 데 그러한 해당언어의 문외한들도 논리적 사고력을 통해 해당 영역에 대해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더욱이 민주시민의 주권행사는 대부분 비전문가들이 전문영역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므로 논리적 사고력 교육의 이러한 문제제기의 효과는 매우 크게 느껴진다. 환경문제, 생명윤리문제, 경제 성장문제, 국가 안보외교문제, 과학기술의 발전문제, 교육 문화문제 등 자신의 비전문 분야에서 나아갈 방향의 결정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 민주시민이다. 그 결정이 잘 못되면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를 합리적으로 하고 잘 못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력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례가 이를 통해 밝혀질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에 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테제1. “효제는 仁의 근본이다”는 번역이 옳다면 원문이 잘 못되었다.

테제2.  원문이 옳다면 “효제는 仁의 근본이다”의 번역이 잘 못되었다.

테제3.  원문이 옳다면 “효도하고 우애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仁을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할 것이다”는 내용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런데 테제2는 정인재교수의 동의뿐만 아니라 <논어>의 정통주석에서도 그런 내용을 최근 발견하였다. 그것(효제)이 바로 仁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孝弟是仁之一事, 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이를 통해 필자의 문제제기가 결코 빗나간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정통 주석에 의거하면 다음 제1종의 번역은 잘 못되게 마련이다.

 여기서는 출판연도만을 제시한다.


제1종의 번역 내용

1-1. “효제는 仁의 근본이다”(1994)

1-2. “효도와 형이나 연장자를 잘 섬기는 것은 아마 仁의 근본일 것이다.” (2005)

1-3. "The Gentleman should exert himself to the basics. For, if they are established, the Way will grow. What is filial and fraternal become, perhaps, the basis of Goodness" (2003)


   이미 오래전부터 제1종의 번역은 잘 못된 것으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번역이 아직도 계속되는 것을 보면 텍스트에 그렇게 오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오늘날 정통 주석을 따르는 번역은 다음과 같다.


 제2종의 번역 내용 

2-1 “孝悌는 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2-2 “효도와 곤경이가 그어짐을 하는 근본이 될 진저” (1977)

2-3 “효성과 공순함이란 것은 仁을 이룩하는 근본인 것이다.” (1985)

2-4 “효도와 공손이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2000)

2-5. “효성과 우애란 것은 인을 실천하는 기본일 게다. (2005)

2-6. “효와 제라는 인을 실천하는 데 근본 것이다. (2007)


  정통 주석에 따르면 “효제는 仁의 근본은 아니지만 仁을 행하는 근본이다”는 것이다. 특히 그 풀이에는 ‘本性’과 ‘用’의 개념구분이 도입된다. 즉, 仁이란 本性 그 자체이고 孝悌는 그것의 한 用이다. 따라서 본성 속에는 효제가 들어 있지 않다. 본성의 측면에서 볼 때 孝悌가 仁의 根本이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用의 측면에서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한다. 本性과 用의 개념을 통한 이러한 풀이는 설득력 있게 느껴 일단 옳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그렇게 전제할 때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어려운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텍스트의 바로 앞의 本立而道生 과의 연결 관계가 문제다. 특히 道에 관한 언급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있어야 할 것 같은 데 없기 때문이다.


둘째, 정통 주석에 따른다면 本性의 本과 道가 있고 用의 本과 道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도 문제다. 그러면 孝悌는 本性의 本은 아니지만 用의 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텍스트 자체가 오해를 초래하기 쉽게 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本이라고 하면 으레 본성의 본을 연상하기 쉽기 때문이다.


셋째, 필자는  만약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를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면 本性과 用의 개념 없이도 앞에 本立而道生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테제 3:

“효도하고 우애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仁을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할 것이다”


  효제와 인은 추상적인 덕목이지만 사람의 행동과 연결될 때에 구체화된다. 따라서 효제하는 인간 모두가 반드시 인의 실천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테제 3과 같은 번역을 보지 못했으며 그것이 가능한지 판단할 능력도 없다.


넷째, 간략하게 표현하면 오늘날 지배적인 번역은  ①“孝悌는 仁의 실천의 근본이다.”이고 필자의 번역은 ②“孝悌는 仁의 실천을 근본으로 한다.”인데 양자의 차이가 없다면 문제될 것 없겠으나 그 차이는 크기 때문에 逆理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①‘A는 B의 근본이다’와 ②‘A는 B를 근본으로 한다’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근본’이라는 관계는 ‘아버지’라는 관계처럼 반 대칭적 관계이다. A가 B의 근본이면 B가 A의 근본일 수 없다. 예를 들어 ①‘A (나)는 B(지호)의 아버지다’와 ②‘A(나)는 B(지호)를 아버지로 한다’를 검토해보자. 필자는 텍스트가 옳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면 필자의 번역이 논리적으로 적합하다. 그리고 정통 주석에 따른 제2종의 번역도 옳다. 따라서 ①과 ②는 양립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전통 주석에 따른 번역의 구조①의 ‘나’는 지호의 아버지인데 반해 필자의 번역에 따른 구조②의 ‘나’는 지호의 자녀이다. 따라서 ①과 같은 정통번역과 필자의 ②와 같은 번역이 같다고 하는 것은 마치 할아버지와 손자를 같다는 것이 되므로 두 주장이 동시에 참일 없는 데 그 어느 것도 버릴 수도 없는 역리에 직면한다. 이 역리를 필자는 ‘서학역리’(棲鶴 逆理)로 호칭한다.


다섯째, 제3종의 번역: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일 것이다.(2006)”

물론, 제3종의 번역이 이것 하나만은 아닐 것이지만 이것만을 살펴보자. 여기서는 인의 근본이니 인을 행하는 근본이니 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모르겠으나 <사람의 근본>이라고 색다르게 풀이하고 있다. 저자가 중국인이고 고전풀이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통 주석을 모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이런 번역을 한 것이 기이하다. 그가 혹시 서학역리를 의식했는지도 궁금하다.

                                         2010년 12월 28일


                                                 이  초 식



파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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